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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2-22 01: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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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과 부정이 혼재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평가
  •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가져다 준 이씨조선의 멸문지화


 대원군(大院君)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군호(君號)다. 선대의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게 되면 그 방계 종친이 유교의 종법(宗法)에 따라 타계한 왕의 아들로 입적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때 신왕의 생부(生父)에 대한 예우로 주는 존호(尊號)이다.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1623년 인조(仁祖)는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1849년 철종(哲宗)은 아버지 전계군(全溪君)을 각각 대원군에 추존한 바 있다.

 

 1863년 고종(高宗)이 즉위하면서 부친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이 대원군에 봉해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대원군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정상적 절차에 따라 추존되었으나, 흥선군만은 예외적으로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이하 흥선대원군을 대원군으로 호칭)

 

 대원군에게는 엇갈린 이미지가 뒤따른다. 먼저 견고한 안동김씨의 세력 밑에서 숨을 죽이고 살다가 어린 아들 고종을 왕으로 만든 후 섭정(攝政)을 쟁취한 ‘정치 달인’이라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해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을 망국(亡國)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권력 집착으로 얼룩진 대원군의 생애

 

 대원군은 1820년 서울 안국동에서 출생했다. 8세에 맏형 흥녕군(興寧君)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친 남연군(南延君)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서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7세에는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1841년(헌종 7) 흥선도정을 거쳐 1843년(헌종 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이 된 후 도감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비변사 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에는 한직인 종친부를 운영하는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가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풍수지리를 믿어 아버지 남연군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 대비와 밀약하여 자신의 차남을 익종(翼宗)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져 ‘살아 있는 대원군’이라고 불렸다. 고종이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표면상으로는 조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이 섭정으로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아 10년 동안 조선 조정을 이끌었다. 조선 최초로 대원군에 의한 기형적인 섭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섭정 10년이 지나면서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실각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뒷수습에 힘썼으나, 민비 세력과의 권력투쟁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청국(淸國)에 연행되어 4년여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청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영립되어 친청파인 사대당을 축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려워지자 청국과 통모하다 다시 실패했다. 3국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일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민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 모든 권력에서 물러났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이듬해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

 

대한제국 시절 황룡포를 입은 고종.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 열아홉 살에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강화도령’ 철종은 안동김씨 세력이 골라 세운 허수아비 왕이었다. 이들은 특히 똑똑한 왕족을 경계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상가를 전전하며 ‘궁도령’이라고 불리면서 그들의 감시를 피해 나가는 한편, 그는 병약한 철종이 죽는다면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 은밀히 계산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로서 철종 사후에 왕의 지명권을 갖게 될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대비를 주목했다. 조 대비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세자빈으로 들어와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후 안동김씨 세력에 눌려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대원군은 조 대비에게 접근, 둘째 아들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기로 뜻을 모았다.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1863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 대비는 대원군 둘째 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을 익종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옹립하였다. 1864년, 이렇게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이 탄생하고 대원군은 ‘살아 있는 대원군’으로 조 대비로부터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아 섭정 형식으로 집권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고 조정은 부패했다.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은 흉흉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에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 개항하면서 조선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개방 압력을 받게 되는 등 갈등과 혼란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전면에 등장한 대원군은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안동김씨를 축출하고 세도정치로 소외되어 왔던 남인, 북인의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했다. 이어 행정과 군사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비변사(備邊司)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하여 통치기구를 정비한 후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 법전을 편찬하여 질서를 잡아나갔다. 당시 서원은 붕당(朋黨)의 근거지로서 세금을 면제받아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전국의 600개의 서원 중 47개소를 제외한 서원을 정리하고 그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이어 삼정의 문란을 시정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해 나갔다. 그러나 대원군이 단행한 이러한 개혁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개조가 아니라 전제왕권의 확립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경복궁 중건을 위해 무리한 노동력 징발과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당백전, 원납전 등을 발행하면서 수구세력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위정척사론으로 무장된 수구세력의 천주교 탄압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기 때문에 대원군과 천주교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3년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청국에 다녀오는 기회에 프랑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전래된 이후 천주교신앙공동체가 설립되어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데서 발단되었는데 그 명분은 위정척사였다. 1785년 을사박해(乙巳迫害)를 시작으로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졌다. 신유박해를 거치면서는 일체의 서양서적 전래가 금지되고 천주학 관계는 물론이고 과학, 지리 등의 저술 유입도 철저히 금지되어 쇄국의 일차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대원군 쇄국정책의 단초가 된 러시아의 남하와 천주교

 

 대원군은 이러한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지켜보다가 1863년 섭정을 시작하면서 서방의 개방 압력과 천주교 문제에 직접 대처해야 했다. 그런데 대원군이 대외관계에서 가장 먼저 당면한 문제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아니라 러시아와의 문제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러시아인 5명이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와서 공한을 전달하고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 측이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통상을 거절하자 1866년 초에는 러시아 군함이 영흥만(永興灣)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육로로 러시아 군대가 통상교역을 위해 국경을 넘어올 것이라고 위협했다.

 

 조선 측에서는 1860년대에 들어 많은 조선인이 변방 동북지방의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 러시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토지나 생업거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대원군은 이것이 러시아가 조선을 간섭할 구실이 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기도와 대원군의 고민을 알게 된 천주교도 남종삼(南鍾三) 등은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양국과 제휴하는 것이 좋다는 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이 유럽 각국과 교섭하려면 서양인 신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대원군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는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자신의 아들이 왕(고종)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 고종을 키운 유모 박씨 부인도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대원군의 쇄국의지를 담은 척화비.

 

 미국과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위정척사론은 더욱 강화되고 대원군은 서울 등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전쟁을 강조하면서 강화를 주장하는 자는 ‘매국(賣國)’으로 다스릴 것을 다짐하였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는 것이었다.

 

 미 함대는 다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강화도를 떠나버렸다. 미국의 퇴거 이유는 수도 한양의 점령이 불가능하고, 한양 점령 없이는 조선 정부의 굴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 측은 350명 전후의 전사자를, 미국 측은 3명의 전사자, 10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무기의 현저한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실록〉에는 전사자가 50여 명,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미 함대가 스스로 물러났음에도 이 전투를 승리라고 자축하고 있다.

 

 민비세력의 ‘궁중 정변’과 대원군의 저무는 황혼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한 최익현.


 신일본에서 사이고가 물러나고 정한론이 잠잠해질 무렵,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은 이제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척화-쇄국보다는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민비(閔妃)와 민씨 외척이 있었다. 대원군과의 보혁 갈등과 권력 암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1876년 민비세력은 극우 노선의 척사론자로 대원군의 급진개혁에 반대해 온 최익현에게 접근해 대원군을 축출할 것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스승인 이항로가 대원군을 지지했기 때문에 비판을 자제했었는데 이항로가 죽은 후에는 경복궁 중건 중지와 서원철폐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면서 고종이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아버지가 섭정할 필요가 없으며 조정 업무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대원군 지원세력의 반발이 거셌지만 민비와 일가의 의도되고 준비된 궁중 거사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를 옹호하고 1873년(고종 10)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문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했다. 살아 있는 대원군이 실각한 것이다.

 

 그러나 물러난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멈추지 않았다. 권력 복귀를 시도했다. 개혁세력이 정국의 전면에 나섰으나 국론은 분열되고 열강의 세력경쟁을 몰고 왔다. 대원군은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을 이용해 1881년 자신의 서자(庶子) 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고종 폐립 사건에 관여했다. 이듬해에는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해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한 달 만에 임오군란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4년여를 청국에서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이어 1887년에는 큰아들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1894년에는 일본의 간계에 이용당해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乙未事變)에 연루되는 정치적 오류를 범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주한일본공사관의 공사 미우라와 서기관 스기무라는 대원군을 이 사건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어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대립 구도를 부각시키고 대원군에게 접근해서는 손자 이준용의 신변도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해 대원군의 협조를 얻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을미사변에의 연루는 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준 것은 분명하다.

 

 

  대원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을미사변 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다가(아관파천·俄館播遷) 1년 후 복귀한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하고 황제에 올라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민비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봉하고 국장을 성대하게 치렀다. 1898년(광무 2) 대부인 민씨(고종의 생모)가 세상을 떠나고 대원군은 일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대원군에게는 여러 평가가 뒤따른다. 먼저 안동김씨의 견고한 외척세력을 타도하고 ‘살아 있는 대원군’이 된 정치적 달인의 이미지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조선사회를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쇄신했던 개혁가의 이미지도 있다. 미국인 헐버트(H.B.Hulbert)는 《한국견문기》라는 저서에 “그는 목표가 정해지면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굴하지 않고 목표 달성을 위해 돌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실로 그는 조선 정계의 마지막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고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주한미국공사 허드(Augustine Heard)는 그의 보고서에서 “왕비 민씨가 우두머리인 민씨 척족은 왕궁 내의 거의 모든 권세와 부귀 있는 자리를 독차지하여 미움을 사고 있다. 만약 실력 있는 지도자가 출현한다면 혁명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 인물 주위에 결집할 것이다. 현재로선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의 소유자인 흥선대원군 말고는 그런 역할을 담당할 인물이 없는 것 같다”고 당시의 대원군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정치에는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른다. 서원철폐 등의 정책에 반발했던 유생들이 남긴 부정적인 기록과 대대적으로 탄압받았던 천주교인들이 남긴 평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대원군의 개혁이 조선왕정을 되살리기 위한 복고적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에다가 서원에 딸린 땅과 노비를 몰수함으로써 왕실 재정을 늘렸으나 사대부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지나친 권력 편집 성향과 더불어 전제왕정 복고에 그의 정치력을 집중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대외정책의 오판은 더욱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시기 조선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척화와 왕정복고가 아니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근대화를 실현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했다. 화이적 명분론(華夷的名分論)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를 심화시킨 것이다.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에 저항하면서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역임했던 역사학자 문일평(文一平)은 그가 남긴 《조선인과 국제안(國際眼)》에서 조선이 국가적으로 실패한 원인으로 민기(民氣)의 위미(萎靡)와 지도자의 ‘국제적 문맹’을 지적하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대원군을 꼽았다. 망국(亡國)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대원군의 외교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날 우리의 국론은 지나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급속히 변화하는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돌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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