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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의 영예에 빛나는 화가 엄혜란
  • 편집국
  • 등록 2021-02-25 00: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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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적 정서를 강조한 부조 미술작가의 삶과 창작
  • 청림 엄혜란작가의 화폭에 일구어 낸 역작들.....


 엄혜란작가는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며 “ 내 그림에 대한 감성의 운명이 허락하는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엄혜란작가는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열정을 갖고 그림을 그려낸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림을 담아낼 것이 분명하다.


“내 작품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내 그림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

지난 몇 해는 항상 마지막 작품을 그린다면서 살았다.” 

기자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던진 엄혜란작가의 말이다. 


짧다면 짧은 엄혜란작가의 말에 화가 엄혜란의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들어가 있다. 

쇠락해가는 주변 아름다움의 한계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마음, 그 속에서도 격렬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근황, 하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나날 속에서도 현실적 자아와 다른 시적 자아는 갈 수 있는 한 열심히 아주 멀리까지 걸어가 보겠다는 낙관의 자세를 갖고 있다. 

서정적이면서 예민하고, 담담하면서도 희망적인 작품을 보려고 지난 23일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에 있는 그의 화실을 찾아 갔다. 


그는 언젠가 “과거의 나에게 미술은 험한 산지, 지금은 막막한 들판, 미래는 노을 한 자락이 묻은 저무는 바다”라고 했는데 험한 산지를 걸어온 그의 작품들은 막막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랑해 경쾌한 스텝에 끌려가게 된다. 

인터뷰는 모든 작품들이 어떻게 이렇게 경쾌할 수 있느냐에서 시작했다. ‘악조건 속에 그렸기에 더 아름다운, 고통 속 삶의 찬가’라는 것이 엄혜란 작가의 답이었다.



―고통 속 삶의 찬가, 뭔가 철학적 요소가 가미된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모든 작품들 하나 하나 가장 악조건 속에서 일구어 냈다. 

이전 작품을 그려 낼 때는 괜찮았는데 시력이 나빠졌다. 하지만 아픔없이 탄생되는 작품이 어디 있나. 작품 하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진다는 건 일종의 아픔이고 위기인데 그걸 이겨낸 기록이다. 고통과 위기가 없는 삶보다, 그걸 이겨낸 삶이 더 깊고 가치 있다. 힘들어서 더 좋았다.”


―경쾌하고 낙관적인 자세가 평소 작품활동을 하는 가운데의 오랜 습관인가.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나타나는 일종의 태도다. 작품의 장애가 생기면 어떻게 이길까 생각하며 작품활동에 임했다. 물론 어려움을 피할 생각은 안 했다. 좋든 나쁘든 피해서는 안 된다. 아마 이런 태도가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게 만든 이유, 싱싱한 서정화를 그리 한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화가는 요즘 ‘이길까’보다 ‘견딜까’를 먼저 생각한다고 했다. 


작품 구상중에 위기나 장애가 오면 이길 생각을 하지만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작품의 구상은 비교적 수면속에서 이미 만들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작업을 통해서는 성취되지 않을 떼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견뎌야지. 견뎌내는 것”이라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즐기면 삶이 밝아지고 삶의 근본적인 짐 가운데 많은 것이 덜어진다고 했다.


―창작구상을 하는 힘으로 늘 호기심과 상상력, 그리고 숙면에 있을 때 착상된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잠속에서의 작품에 대한 상상력은 지금도 변함없다. 내 안에 많은 것이 변하겠지만, 늘 새로워야 한다는 각오로 지냈다. 그러나 숙면 가운데서 일어낸 상상력도 내가 그것을 갖고 작품을 그려낼 열정이나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어낼 힘이 없어지면 의미가 없다. 때문에 나는 항상 작품에 대한 착상이 가슴에 스며들면서, 곧바로 화폭에 담아내려 노력한다.”



―엄혜란작가의 작품세계를 ‘부조미술’이라고 명명했다. 


“오래 전부터 의식하기 시작했고, 내 작품이 태동될 때 ‘부조미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좋은 그림들은 처음과 끝의 정황이 같다. 나는 시작은 다른 장르의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결의 단계에선 변화를 일으키고 끝이 달라진다. 통속적으로 보면 ‘거듭남’이다. 거듭남을 통해서 전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 했다. 아마도 한국 화단에서의 부조미술의 장르를 이어 가면서 한국적 정서를 이룬 화가가 아닌가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림이 무엇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너무 쉽고 또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답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그림를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라 답할 자신이 없다. 그저 열심히 그림을그렸다는 것 외에 할 말이 없다.”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보답이 적은 게 미술이라고 했는데 화가로서의 삶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화가들, 예컨대 천경자나 운보 김기창 같은 작가들은 그들의 길을 만들었다. 또한 작가 엄혜란도 내 길을 만들어 온건 분명하지만, 누구와 비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나 자체로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그렸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도 많다. 그럼 됐다. 그 이상 세상에 더 바랄 게 없다.”



엄혜란작가는 자신에 대해 말할 때 늘 ‘체험의 공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배웠고, 벨기에에는 3대 유명 화가도 있지만, 2대가 유명한 화가는 그리 없다. 문학·음악과 달리 미술은 체험, 그중에서 가족적인 체험이 중요하다. 

그런데 언니가 체험을 선점하기에 동생은 할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서 받은 것만큼이나 벗어나려 애썼다고 했다.  엄혜란작가의 동생인 엄혜영작가의 말이다. 


“언니는 미술에 대한 순수한 자세에서 나보다 한참 앞선다. 언니는 모든 점에서 프로페셔널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미술에 메여 살지는 않았다. 그런제 언제부턴가 나는 언니의 작품활동에 매료가 되었고, 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니는 나에게 있어 예술적 멘토가 돼버렸다.” 


―앞으로의 한국미술에서 짚어봐야 할 점은 무엇이 있는가.


“전통 교육을 잘 다져야 한다고 본다. 중국만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지필묵을 다루도록 하고 있어서 소위 ‘국화(國畵)’의 인구가 엄청나다. 자기네 근현대 작품들 또한 그 가치를 견고히 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건축에서 전통적 일본 미학을 현대 미학에 접목해 꽃피우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도 이 부분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전통과 정체성을 다져서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예술교육의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대부분의 미술애호가가 한국화란 지필묵으로 그린 수묵화를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그려진 동양화를 말하는 것인지 혼동하고 있다. 그 틈새에 서구 미니멀리즘 등이 밀려들며 근대미술사는 공백으로 남겨진 채 서구 미술 일변도로 흘러갔다.

실제로 회화의 국가별 명칭을 돌아보면 중국은 국화(國畵), 일본은 일본화(日本畵), 북한은 조선화(朝鮮畵)라고 해 그 가치를 자국의 이름을 붙여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다.(편집자 주)



기자가 엄 화백의 작업실을 봤으면 한다고 청했더니 기껍게 응했다. 작업대와 함께 각종 화구가 있는 작업실 오른쪽 벽면을 부조미술 작품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한동안 한국화단은 수묵(水墨) 위주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질감을 강조한, 추상표현주의가 나왔다. 그게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나는 과감하게 한국만의 토속적 향기를 낼 수 있는 부조미술에 참여했다. 내가 부조미술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한국만의 토속적 작품으로 출발해서 오늘날까지 왔다. 내 것을 찾아 작품활동을 하려고 작심한 마음으로 미국에 체류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연과 조화’, 그 후 ‘자연과 공존’, 그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했으며, 그 후에 ‘무위(無爲)’ ‘진여(眞如)’, 지금은 ‘잔상(殘像)’단계로 넘어와 있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모른다.”

기자는 작업실 오른쪽 문을 열고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작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생 영예의 작품이다.” 

칠흙의 어둠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는데, 유난히고 부엉이의 모습은 또렷했다. 서양화 장르의 부조미술 전위 그룹에 속해 과감히 선보이던 소녀 시절의 패기가 느껴졌다.


―서양화를 하면서 부조미술을 택한 것은 실험 정신이었나.


“물론이다. 지금까지의 기성작가들 작품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세계적인 시류를 따라 추상화를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로 한국적 내음이 가미된 부조미술을 창작하기 이른 것이다.”


작업실을 나와 응접 소파가 있는 거실로 다시 왔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그림들의 다채로운 색감과 두꺼운 질감이 사뭇 매혹적이다. 서양화, 아니 부조미술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엄 화백 특유의 기법이 녹아 있는 덕분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전통미에 현대적 기법을 입혔다는 평가를 듣는다. 서양화, 

그중에서도 한국의, 정서를 담아 낸 것인데 서양화의 색·질감을 다 보듬고 있다. 흔히 서양화는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말하는 반면에 동양화는 화선지에 먹으로 그리는 그림을 일컫는다. 물론 동양화 중에도 천에다 채색한 그림도 있다. 한국화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중국, 일본과 다른 우리 그림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엄화백에게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양화 중에서 한국화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회화라는 건 본래 동서가 없는 거다. 사람이 그냥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백인, 흑인, 황인종이 있듯이 그림도 표현 방법과 정신세계의 전통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서양에선 르네상스 이후 인상파 등이 생기고 허무주의, 다다이즘까지 나왔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 마르셀 듀상의 소변기 작품 등은 처음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중에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런 식으로 서양 미술이 발전해 지금은 자동차를 찌그러트리는 환경 미술,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예술이 나왔다. 최근엔 인터랙티브(interactive) 아트라는 대화 형식의 그림도 생겼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음성을 인식해 색이 나오는 텔레 인터랙티브까지 왔다. 서양 미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과학과 함께한다.”


그의 설명은 얼음에 박 밀듯이 유창하게 이어졌다. “작가의 혼(魂)이 실려야 작품이라고 한다. 동양화에 주로 쓰는 게 먹이다.(앞에 있는 종이에 한자 먹 묵(墨)자를 쓰며) 여기엔 명도(明度)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색상을 합치면 결국 무채색이 되고, 그 안에 이미 밝고 어두운 게 다 들어가 있는 거다. 이를 화선지 위에 표현하는 게 동양화다. 동양인들은 지구가 그 자체로 음이며, 태양이 있어서 그 빛을 받아 색이 나온다는 걸 진작에 깨달았다. 그게 동양 사람의 정신이고, 동양화의 정신세계다.”



―그림 재료와 정신세계 이외에 표현 기법의 차이도 있는 듯하다.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필력이 있어야 한다던데.


“일필휘지는 기본이고, 심안(心眼)으로 표현해야 한다. 식물을 보더라도 이게 커서 꽃을 피울지 열매를 맺을지 심안, 즉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표현하는 게 서양화의 정신이다. 

나는 가능한 먹으로 그리는 걸 피하고, 아크릴로 빨리 그리지만, 작품의 필요에 따라 페인팅 자체를 내가 직접 제조해서 사용한다.

내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부조미술을 고수하는 건 우리 전통의 원형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게 의무라고 느낀다. 온고지신은 고리타분한 게 아니다. 옛날 것을 받아서 이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것이다.”


기자는 질문의 화두를 작가들의 위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경자, 이중섭, 박수근 등 대가의 작품에 대해 위작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논란을 막을 방법은.


“어떤 작품이 고가에 팔리면, 가짜가 수없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소유자가 가짠 줄 알면서도 좋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이우환 작품 논란도 생기고, 조영남 대작 사건도 나오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작가의 양심이다. ‘무자기(毋自欺)’라고 했다.(그는 또 종이에 한자 毋自欺를 그리듯이 썼다.) 자기를 기만하지 말라, 이게 가장 중요하다.”

엄혜란작가의 활약은 지금까지 부조미술을 계승해 나가는 자존심이다. 엄혜란작가 그 스스로자부심이 크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예술가로서 더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고 했다.


“예술은 완벽이란 게 없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면 예술인으로 끝난 거잖는가. 예술가로서 좀 더 깊이 있는 표현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그러다 보니 항상 손이 아팠고, 몸이 괴로웠다. 그런데 지난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후 괜찮아졌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


이젠 부산지역 분들을 위해 작은 전시회를 갖는 것도 자부심을 느낀다. 

시민들이 제 작품을 봐줄 때 기쁘기 한량이 없다.”


그는 현재 평소 미술에 깊이 침잠해 온 고독한 예술가로서 작품을 함께 해 온 동생 엄혜영에게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고 했다. 

그에게 언제나 상담자 역할을 해 줬고, 신예작가 엄혜영은 직품 파트너이자 웅숭깊은 언니로서 큰 힘이 됐다. 


엄혜영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응답했다. “언니 작품은 날카롭고, 한편으론 깊고 부드럽다. 

나는 그걸 모두 섭렵하려 한다 자매지간이니 서로 맞는 직업을 택한 셈이다.”


다른 형제들도 미술 재능을 타고났을 텐데, 화가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섭섭하지 않을까.


“혜영이가 미술적 재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름의 돈톡한 재능을 갖고 있다.”


엄혜란 화백은 전업 작가 중 ‘한국 부조미술의 대표작가’로 통한다. 

지난 2019년 제38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전통공예부분 대상을 수상한 자체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엄혜란, 엄혜영작가는 자매지간이기도 하지만, 한국 부조미술의 시작이며 동시에 정점이다. 

엄혜란작가가 한국적 부조미술의 길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엄혜영작가는 그 길 위에서 한국적 추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을 이끌어 내고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관계자들은 엄혜란작가를 가리켜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작가”라고 평가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맥을 이어가는데 가장 크게 기록될 작가”라고 칭찬했다.


굳이 그 같은 평가와 조사 결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화단에서는 한국 현대 보조미술을 개척하고 이끌어온 대표적인 작가로 그를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부산여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전통공예부분에서 수상한 대상작은 바로 ‘향연’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잔치’라는 뜻이다. 전통한지 바탕에 수 백 번을 꼬아 108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황금빛 색상을 더한 바로 이러한 작품이다.



엄혜란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천부적인 재능을 이어받아 손으로 하는 작업은 무엇이든지 잘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을 정도다. 학창시절 많은 상을 받기도 했으며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15년 동안 공부하러 미국에 갔다가 국내로 들어온 지 7년이 지났다.


1998년 L.A, 라스베가스 등 초대전, 국회 개인전, 어반플레이스 초대전, KBS 갤러리 초대전, 상해 구퍼 현대미술관, 밀라노 산페데레 갤러리, 중국 웨이하이시 유곤미술관, 프랑스 앙데팡당, 미국연방 국회전, 워싱턴인사당 초대전, 인도품바이 등 그룹전 다수, 한국예총상, 서울시장상, 국내외 미술대전 수상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탁월한 실력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대한미술협회, 경남예술나눔작가협회, 한얼우리협회, 대한미협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노력하는, 작업에 혼을 불어넣는 작가이고 싶다.’는게 그의 독백이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는가


“계획을 세워놓고 일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평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예술과 그림그리기의 노예가 돼 게으르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고, 아울러 우리 한국만의 부조미술화의 저변 확대와 세계화 방안을, 다양한 국제교류나 전시 세미나 등을 통해 꾸준히 시도해볼 생각이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서의 그리움!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먼 곳에의 그리움 中)


떠나고 싶은 ‘먼 곳’을 머릿속에 그릴 때면, 회색 어둠과 함께 소리 없이 내리는 안개비, 그리고 노란 가스등 아래 젖은 아스팔트가 떠올랐다. 

그가 대한민국 미술사 영예에 빛나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전통공예부분 대상을 수상한 것은

2019년의 일이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거듭 밝혔던 동생 혜영과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나눈 가족들, 그들이 있어서 그는 행복했고, 그 누구도 그의 예술적 끼를 막진 못했다.


소녀 시절부터 “절대 평범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던 엄혜란. 스스로 화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운명인 것인지 우리는 오늘도 알지 못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순간 순간을 사랑하며 예술의 의지를 불태우는 그가 행복에 이르는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삶에 대한 저항이었으리라, 



그의 화실이 있는 부산 해운대 달맞이 길은 그 어느 곳과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불빛이 덮인 거리, 노란 가스등, 차고 신선한 공기… 태평양 바다의 한 줄기에 비춰지는 해운대 바다가 가로등과 별빛 아래 검게 빛난다. 이곳은 그가 매일같이 걷는 그 어느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답다. 오늘 밤도 그는 이곳을 걷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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